현실과 환상, 인격과 연기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영화,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독창적인 시네마입니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후예이자 영상 언어의 해체자 카락스는 이 작품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역할에 대해 대담하게 해부합니다.
1. 영화가 연극이 되고, 삶이 배역이 되는 시간의 여정
《홀리 모터스》는 주인공 ‘오스카’가 하루 동안 여러 인격으로 변신하며 파리 곳곳을 돌아다니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그는 리무진 안에서 다음 역할을 받고, 분장을 거쳐 다른 인물이 되어 거리로 나섭니다. 암 환자, 거지, 괴물, 아버지, 연인 등 다양한 정체성을 소화하는 그는 더 이상 단일한 자아가 아닌 ‘존재하는 자’ 그 자체가 됩니다.
이처럼 반복되는 변신의 여정은 삶과 예술,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듭니다. ‘오스카’가 소화하는 역할은 단지 영화 속 캐릭터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끊임없이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과도 겹칩니다. 관객은 이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가족’의 역할을 연기하던 오스카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떠나는 순간, 관객은 ‘연기’가 갖는 현실성과 그 이면의 허구성을 동시에 체험하게 됩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오스카는 인물이라기보다는 무대 위 ‘존재의 개념’으로 다가오며, 그의 여정은 단순한 스토리가 아닌 인간 존재의 변증법적 궤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는 신체적 소모가 따릅니다. 분장을 반복하고 표정을 바꾸고 목소리를 변조하는 오스카의 행위는 단순한 연기가 아닌, 육체로 각인된 고통의 예술이기도 합니다. 연기란 결국 몸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며, 그만큼 ‘존재’는 항상 물리적인 소멸을 동반합니다.
2. 영화라는 환영: 셀룰로이드와 디지털 시대의 미학
카락스는 《홀리 모터스》를 통해 20세기 영화의 아름다움을 디지털 시대의 공허함과 병치시킵니다. 영화 초반, 오프닝 시퀀스에서 카락스 본인이 직접 등장해 잠긴 영화관의 벽을 뚫고 ‘관객’과 ‘이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장면은 영화사적 장치의 무너짐을 상징합니다.
클로즈업, 롱테이크, 화면의 질감 등 고전 영화의 미학은 계속 등장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기능적 목적이 아니라 ‘감정의 잔상’으로만 작용합니다.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화면 속 오스카는 ‘실재하지 않는 리얼리티’에 갇힌 채 무대 위 배우처럼 배역만을 전전합니다. 이것은 곧 현대 인간의 정체성 또한 이미지와 역할로만 구성되어 있음을 반영합니다.
또한 영화 후반부의 ‘사운드’ 연출 역시 인상 깊습니다. 음악은 감정을 이끄는 도구가 아니라, 인물의 빈 공간을 메우는 정서적 레이어로 작동하며, 영화와 현실 사이의 거리를 느끼게 합니다. 이는 영상만큼이나 ‘소리’ 또한 카락스의 미학 속에서 중요한 서사 도구로 사용됨을 시사합니다.
이 영화는 질문합니다. 오늘날 인간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편집된 이미지의 조각들로 소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기대된 ‘카피본’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3. 인간이라는 존재, 혹은 끝없이 반복되는 상연의 주체
《홀리 모터스》가 가장 날카롭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존재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오스카는 잠들지 못합니다. 그는 “역할을 소화하는 것이 직업”이라고 말하며 스스로의 삶을 연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왜, 무엇을 위해 연기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감독도, 제작자도, 카메라도 없는 이 무대에서 그는 단지 ‘해야 하니까’ 연기합니다.
이는 현대사회의 모든 인간에게 던지는 은유이자 반문입니다. 우리 역시 수많은 배역을 수행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부모, 자식, 연인, 직원, 시민… 각기 다른 역할 속에서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카락스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모두가 그 질문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등장하는 리무진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이 모든 상연이 끝난 뒤에도 ‘기계’조차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과 사물, 주체와 객체, 삶과 연극의 경계가 무너지는 이 시퀀스는 영화의 철학을 집약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살아있는 자는 모두 연기자이다
《홀리 모터스》는 명확한 결말도 없고, 전통적 서사도 따르지 않지만 오히려 그것이 이 영화의 본질입니다. 삶이란 본디 연속적인 상연이며,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무수한 변주의 집합이라는 메시지를 깊이 있게 전달합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남는 것은 오스카가 아닌, 우리 스스로의 얼굴입니다. 과연 오늘 나는 어떤 배역을 살아냈는가, 그리고 내일은 어떤 역할로 다시 무대에 설 것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카락스가 던지는 진짜 대사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관객이 아니라, 무대 위의 배우이며, 동시에 무대 자체입니다. 《홀리 모터스》는 이 불편한 진실을 아름답고도 기이한 방식으로 마주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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