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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사적인 것이 세계를 설명할 때: 고레에다식 휴머니즘 (가족, 일상, 윤리)

by eee100 2025. 4. 11.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일상의 조용한 떨림 속에서 세계의 감정적 지형을 재배열합니다. 감정을 말하지 않고, 갈등을 폭발시키지 않으며, 대신 사소하고 느린 순간을 통해 인물의 내면과 사회의 결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그의 작품에서 ‘가족’은 제도보다 감정이고, ‘일상’은 사건보다 서사이며, ‘윤리’는 규범보다 관계입니다. 이 글은 고레에다 특유의 감정 리듬과 서사 윤리를 새롭게 해석하며, 작고 사적인 장면들이 어떻게 세계를 설명하게 되는지를 살펴봅니다.

가족이 아니라 관계로서의 가족: 상호성의 감정 구조

고레이다 히로카즈 영화

 

고레에다는 가족을 고정된 사회 단위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감정적 상호성의 구조를 탐구합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혈연의 위계를 흔들며, 아버지란 이름이 유전자보다 관계의 지속성과 책임에서 비롯됨을 질문합니다. 가족은 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돌봄과 일상의 반복에서 스스로 만들어지는 감정의 구조물로 제시됩니다.

 

『어느 가족』에서는 생계형 범죄와 돌봄이 공존하는 가짜 가족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구성은 가족을 가장 가족답게 보여주는 역설이 됩니다. 그들은 법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지만, 정서적 연결로서의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고레에다는 이를 통해 제도적 가족에 내재된 폭력성과 배제성을 드러내고, 감정과 윤리로 이어지는 관계를 더 진실한 가족으로 그립니다.

 

그의 가족 서사는 근본적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의 운동입니다. 정형화된 가족 이미지가 아닌, 엇갈리고 어긋난 감정의 편차 속에서 가족이라는 감정 구조는 구성되고 재구성됩니다.

 

고레에다는 질문합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감정은 법의 이름 아래 규정될 수 있는가? 그의 대답은 항상 같지 않지만, 그 대답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고레에다의 휴머니즘은 멈춰 있지 않습니다.

사소함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상의 층위

고레이다 히로카즈 영화

 

고레에다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사건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감각의 반복성과 정서의 층위를 가져옵니다. 그는 인물이 밥을 짓고, 길을 걷고, 장을 보는 일상을 천천히 따라가며, 그 리듬 자체가 인물의 존재 조건이자 세계 인식의 틀이 됨을 강조합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반복되는 식사 장면은 단순한 가족 모임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말들이 축적되는 감정의 장입니다.

 

그의 영화는 대사로 설명하지 않고, 동작과 침묵 사이에서 감정을 유도합니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이 능동적으로 감정의 층위를 따라가게 만들며, 보는 행위가 해석의 과정으로 전환됩니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이 일상을 유지하는 장면들은 그저 생존이 아닌, 사회에 의해 제거된 존재들이 세계와 관계를 맺기 위해 발휘하는 감정적 저항입니다.

 

고레에다는 사소한 것이야말로 삶의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흐름을 추적하고, 구조가 아니라 감정의 결을 따라갑니다. 이러한 감각의 영화는 관객이 익숙했던 세계의 틀을 낯설게 만들고, 우리가 놓치고 있던 정서의 잔류를 다시 보게 만듭니다.

침묵의 시선, 여백의 윤리: 감정이 머무는 장소

고레이다 히로카즈 영화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장면은 종종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장면입니다. 그는 말의 부재 속에서 감정이 어떻게 머물고 자라나는지를 시청각적으로 설계합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자매들이 함께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설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 속에 흐르는 감정은 언어보다 밀도 깊게 스며듭니다.

 

그의 연출은 말하기보다 보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인물이 사라지고 난 뒤 남은 공간, 카메라가 몇 초 더 멈추는 화면은 감정이 움직이지 않고 가라앉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여백의 시간은 서사적 공백이 아니라, 감정이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고레에다의 시선은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고, 감정이 도달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또한 그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대신, 감정의 장소들을 배열합니다. 침묵, 뒷모습, 거리의 소음, 쏟아지는 빛 등 모든 시각적·청각적 요소가 감정의 중력으로 작용합니다.

 

관객은 이 중력에 이끌려 감정의 결을 읽어내며, 자신의 감정 기억을 함께 호출당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고레에다의 휴머니즘은 단순한 따뜻함이 아니라, 감정을 구성하는 윤리적 책임의 미학으로 확장됩니다.

사소한 것의 윤리, 말 없는 감정의 정치학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인물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을 사유합니다. 가족은 구조가 아니라 연결의 감도이며, 일상은 정보가 아니라 감정의 궤적입니다.

 

침묵 속에 머무는 감정들은 관객을 정서적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며, 질문하게 만듭니다. ‘나는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 ‘어떤 감정을 살아내고 있는가?’

 

그의 영화는 작고 느리고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감정을 구성하는 세계의 윤리가 숨 쉬고 있습니다. 그 휴머니즘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에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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