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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2019) – 계단 아래, 누구의 냄새인가

by eee100 2025. 4. 15.

기생충

《기생충》은 빈곤과 부, 지하와 고지대, 냄새와 향기 같은 이분법 속에서 계급 간의 긴장과 모순을 풍자하는 작품이다. 봉준호 감독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대 사회의 불평등이 어떻게 감정, 공간, 인간성을 뒤틀어 놓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1. 계단이라는 언어: 공간이 말하는 계급의 심리학

《기생충》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치는 ‘계단’이다. 기택 가족이 사는 반지하의 창문은 길보다 낮고, 빗물이 들이치는 곳이다. 반면 박사장의 집은 높은 언덕을 올라가야 도달할 수 있는 고지대에 있다. 이 두 공간 사이를 오가는 수직 이동이 바로 영화의 심장이다. 단순한 배경이 아닌, 계급 구조를 시각화한 메타포로 기능한다.

 

계단은 오르내릴 때마다 인간의 지위를 변환시킨다. 기택 가족이 박사장의 집에 발을 들이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장면은, 일종의 '계급 상승의 의례'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그 의례는 진정한 상승이 아니라 '연극'일뿐이다. 이들이 집 안에서 수행하는 가사노동과 역할극은 부자들의 공간에서 ‘기생’ 하기 위한 위장술이다.

 

영화 후반, 이들이 갑자기 몰락하게 되는 장면에서도 계단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폭우가 내리는 날, 기택 가족이 박사장의 집에서 급하게 빠져나오는 장면은 계단을 수직 낙하하듯 내려오는 구조로 촬영된다. 카메라는 집에서 반지하까지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끊임없이 내려가며, 그들이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밀려나는 과정을 감정적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빗물과 오물 속을 걷는 이들의 발걸음은 마치 현실이라는 이름의 냉혹한 중력에 의해 무너지는 이상향의 환영처럼 보인다.

기생충

2. 냄새와 침입, 부드러운 폭력의 작동 방식

《기생충》은 '냄새'라는 비가시적 감각을 통해 계급의 본질을 드러낸다. 기택 가족의 냄새는 단순한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계층적 위치를 규정하는 정체성의 흔적이다. 박사장 부부는 겉으로는 정중하고 관대한 인물들이지만, ‘냄새’에 대한 은근한 거부감은 그들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계급적 편견을 보여준다.

 

냄새는 그들을 ‘우리와는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는 신호다. 박사장이 기택을 언급할 때, “선을 넘지 않는 게 좋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결정적이다. 여기서 ‘선’은 실제의 물리적 경계가 아니라, 감정적·계급적 거리감이다. 이 선은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며, 하층민은 존재를 지우되 기능만 수행해야 한다는 부유층의 무의식적 요구를 반영한다.

 

기택은 이 말을 듣는 순간, 내부에서 무너진다. 그가 끝내 폭발하는 건 가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철저히 '도구'로만 취급당한다는 모멸감 때문이다. 봉준호는 이처럼 말 한마디, 시선 하나, 후각적 반응으로 부드럽지만 치명적인 ‘계급 폭력’을 보여준다. 《기생충》은 칼이나 총보다 냄새와 말투가 더 날카로울 수 있음을 증명하는 영화다.

기생충

3. 반전과 붕괴, 장르를 넘는 불편한 희극

《기생충》은 처음엔 코미디처럼 시작한다. 기택 가족이 박사장네 집에 하나둘씩 스며드는 과정은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띠며 관객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중반 이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지하실이라는 제3의 공간이 등장하면서, 이 집의 진짜 구조와 사회의 숨겨진 계층이 드러난다.

 

지하실에 숨어 사는 전 가정부의 남편은 또 다른 ‘기생충’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기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또한 자신만의 충성을 가지고 있으며, 나름의 질서를 지키고 살아간다. 이 지하 공간은 반지하보다도 더 깊은 곳에 위치한 ‘사회적 망각의 장소’다. 이로써 영화는 기생하는 자와 당하는 자,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결말에서의 폭력은 단순한 참극이 아니다. 그것은 누적된 모멸감과 불평등이 한순간에 폭발한 결과다. 그러나 영화는 이 폭력조차 해소되지 않은 채 남긴다. 오히려 그 후, 다시 반복되는 빈곤의 악순환이 보여지며 관객에게 더 큰 허무를 남긴다. 꿈꾸는 미래조차 현실에서 닿을 수 없는 '계획'에 불과하다는 마지막 장면은, 희망조차 허구임을 웅변한다.

 

《기생충》은 계급이라는 구조가 어떻게 공간과 감정, 일상과 관계에까지 침투하는지를 집요하게 해부한다. 웃음 속에 감춰진 불편함, 익숙한 풍경 속의 낯섦. 이 영화는 '우리 안의 계급'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계단은 여전히 존재하고,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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